나는 서울에 살고 아들네는 가까운 성남에 산다. 23개월 된 친손녀가 있다. 며느리가 직장을 다니는 관계로 낮에는 아내가 지하철로 성남까지 통근하듯이 다니면서 손녀를 돌봐준다. 나는 특별히 나를 초대하지 않으면 아들네 집에 가지 않는다. 불편해 할까 봐서이다. 그래도 할아버지가 해야 할 굵직굵직한 돈 드는 일은 내가 처리해준다.
가끔 손녀가 집에 오면 "할아버지 어디 있어?" 하면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거나 아장아장 걸어와서 나를 쿡 찌른다. 말은 못해도 알고 있다는 표시다. 손녀를 자주 못 봐서 그런지 최근에 손녀의 태도가 변했다. "할아버지 어디 있어?" 하고 물어도 도통 반응이 없다. 내가 안아보려고 팔을 벌려도 지어미 치마 뒤로 숨어버린다. 그럴 때는 아들 내외가 아주 당황해 한다.
"할아버지야 할아버지!" 하고 타이르듯 아들 내외가 몇 번 말을 하지만 심드렁해 있으면서 얼굴을 펴지 않는다. 자주 보지를 않아서 낮 가림 하나보다라고만 생각했다. 내가 손을 내밀어도 내 손을 잡지 않으려고 등 뒤로 고사리 같은 제 손을 감춘다.
손녀의 이런 행동을 아들이 나한테는 말을 못하고 자기 엄마한테는 말을 했다. 그 이유를 들어보니 일견 일리가 있다. 즉 손녀가 "합부지 합부지"하는 대상은 내가 아니라 자기 외할아버지를 찾는 소리란다. 동네 슈퍼마켓을 하는 외할아버지는 외손녀가 오면 안아주면서 블루스 춤도 추고 이것저것 먹을 것도 주고 잘 데리고 논다고 한다.
그런데 아버지는 빈손만 내밀고 안아보려고만 하니 손녀입장에서는 비인기 상품이라는 거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나도 할 말이 있다. 손녀의 먹는 것을 지어미가 아주 까다롭게 간섭을 하니 지어미 허락 없이 내 맘대로 뭘 사주기가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우리 부모세대는 친손과 외손을 구별하고 친손에 더 많은 애정을 쏟았다. 심지어 내가 죽으면 내 제삿밥을 차려줄 손자라고 각별한 대접을 했다. 지금은 아들보다 사근사근한 딸이 인기가 있다 보니 그 딸이 낳은 외손과 더 가까운 모양이다.
어린아이를 돌보는 할머니의 팔 할이 외할머니라고 한다. 내 친손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딸이 낳은 외손을 양육하는 사람이 많다는 거다. 예전 같으면 턱도 없는 소리다. 우리 사회도 점차 모계사회로 변하는 느낌이다.
며느리가 둘째를 임신하여 나는 될 수 있으면 시댁인 우리 집보다 친정집이 편할 것 같아 친정에 가도록 많은 배려를 했다. 손녀의 입장에서는 자기의 양육자인 엄마가 편해하는 외갓집 모습을 보고 자주 보는 외할아버지가 더 좋을 것은 자명하다.
손녀가 좀 더 자라면 왜 할아버지가 둘씩이나 있는지도 알게 될 것이다. 비록 친할아버지이지만 외할아버지의 인기에 뒤져있고 내 손을 외면하는 손녀지만 보면 볼수록 귀엽고 사랑스럽다. 나는 언제까지나 손녀를 위해 든든한 방풍림의 할아버지 역할을 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