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윤관 장군의 산송이야기

조왕래 2016. 9. 14. 11:46

 

                     (사진설명: 파주시 광탄면에 있는 윤관장군 묘)

 

내가 일하는 건설현장에서 가까운 곳인 파주시 광탄면에 고려의 재상 윤관장군 묘가 있다. 윤관장군 묘에 얽힌 대표적인 산송사건은 가문을 존중하는 유교문화의 조선사회를 이해하는데 아주 귀중한 자료다. 필자가 조사한 내용을 간추려서 올린다. 산송(山訟)은 현대인에게는 아주 낮선 말이다. 산과 관련된 소송인데 특히 묘지 소송이다. 대표적인 사건이 고려의 재상 윤관의 묘와 조선의 재상 심지원의 묘지 소송 사건이다.

 

1, 사건의 발단

파평 윤씨 윤희복 집안에서 수 백 년이 흐르는 동안 잃어버린 윤관장군의 묘를 찾고 있었다. 윤관 묘가 경기도 파주 분수원에 있다는 기록에 의해 찾던 중 마침내 묘갈(무덤 앞에 세우는 둥그스럼한 작은 비석) 두어 쪽을 발견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청송 심씨 심지원의 묘 바로 아래쪽이었다. 심지원은 효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다. 무덤은 먼저 쓴 사람의 기득권이 있지만 심지원의 아들 익현은 효종의 딸 숙명공주와 혼인한 관계이며 효종이 승하한 후 다음 왕인 어린현종을 보좌하는 위치에 있는 막강한 권력의 심씨 가문에서 호락호락 들어줄 리가 만무했다. 두 집안의 대립은 곧 법적 소송으로 발전하였다. 일차적으로 분묘가 위치한 고양, 파주 교하에서 진행되었으나 세 고을 수령이 차례로 소송인과 인척관계라는 점을 내세워 기피하는 바람에 해결을 보지 못했다. 결국 경기도 관찰사를 거쳐 조정에까지 파급되어 양쪽 집안의 목숨을 건 싸움으로 전개되었다. 결국 왕인 영조가 윤관과 심지원의 묘에 모두 제사를 하사하면서 묘를 수호하라고 명하였다.

    

2, 파평 윤씨는 왜 먼 조상의 묘를 수 백 년이 지나고서야 다시 찾으려 했는가?

고려시대는 부계조상에 대한 인식이 강하지 않았다. 혼인풍습에서도 남자가 처가에서 일정기간 사는 남귀여가혼이 널리 행해졌고 남자가 처가 쪽에 거주하다가 처가 쪽 묘역에 안장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러한 상황은 부계 조상의 묘가 여기저기 흩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원대조상의 분묘는 몇 세대가 지나지 않아 이름 모를 고총이 되고 세월과 함께 잊혀 버렸다. 그런데 유교이념을 세운 조선시대에 와서 부계의식이 강해지면서 사람들은 부계조상의 묘를 단장하기 시작했다. 권력이 있는 집안일수록 더 강하게 조상의 묘를 찾는 사회적 큰 흐름이 있었다. 파평 윤씨도 조상의 묘를 찾기 시작했다.

    

3, 왕의 중재를 듣기가 왜 어려운가?

경국대전에 의하면 분묘로부터 문무 관료이며 1품의 벼슬을 한 영의정은 사면 각 90(124.7m)  2품의 경우 80보 생원, 진사의 경우는 40보를 정해주며 그 안에 다른 사람이 묘를 쓰지 못하도록 되어있다. 그 뒤 풍수지리의 영향으로 좌청룡 우백호의 산세 안에는 다른 사람이 묘를 못 쓰게 했으니 묘가 차지하는 면적이 더욱 방대해졌다. 윤관의 묘와 심지원의 묘는 재상으로서 함께 하기는 너무 가까웠다.

    

4, 왕은 어떤 후속 조치를 취했는가?

왕은 명망 있는 가문 출신인 두 사람이 소송에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대립하여 조정을 어지럽히는 상황에 매우 진노했다. 1765년 윤23일 깊은 밤 경희궁 흥화문에 도착한 영조는 심정최와 윤희복을 친히 심문하고 형장을 가 한후 유배형을 명하였다. 일흔 살이 넘는 노구의 두 사람은 형장을 맞아 망가진 몸을 이끌고 귀양길에 올랐다. 결국 윤희복은 귀양길 도중 사망하였다. 가문의 명예를 위해 왕의 진노까지 사면서 죽음도 마다하지 않고 그들은 다투었다.

    

5,산송결과는 어떻게 해결 되었나?

유배를 당하고 죽음에 직면한 상황에서도 두 집안의 분쟁은 해결될지 몰랐다. 산송은 조상묘를 수호하고자하는 위선의식(僞善意識)과 함께 가문의 모든 구성원이 참여하여 필사적으로 저항하였다. 그 때문에 왕권으로도 이를 진정 시킬 수가 없었다. 두 집안의 산송은 대를 이어가며 계속되다가 2010년 윤씨 측에서 이장 부지를 제공하고 심씨 측에서 심지원의 묘를 이장함으로써 250여 년 만에 극적으로 해결되었다.

    

    

점점 조상에 대한 제사에 후손들의 참여율이 낮아진다. 조상의 묘를 지키기 위해 죽음도 불사한 조상들의 이야기를 찾아보는 것도 뜻 있는 일이 다. 조선 후기의 민사소송의 8,9할이 산소와 관련 된 소송이라는 것이 참으로 흥미롭다. 이것은 개인이 아니라 가문의 집안싸움으로 확대되기 일쑤다. 개인주의가 팽배한 이 시대에 목숨을 걸고 가문의 명예르르 지키려는 조상의 이야기를 들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