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영화‘동주’가 뜨면서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윤동주에 대한 이야기가 봇물처럼 쏟아집니다. 하지만 영화 ‘동주’를 보고나서 윤동주를 이해하기에는 많이 부족했습니다. 책의 서문만 읽은 느낌이고 영화의 예고프로를 본 기분입니다. 좀 더 윤동주를 알고 싶었습니다. 송우혜씨가 쓴 ‘윤동주 평전’을 읽고 나서야 객관적으로 윤동주란 불우한 시대를 살고 간 시인이자 독립 운동가를 가슴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564페이지 달하는 볼륨 있는 책입니다. 처음 출간 후 살아있는 증인들을 더 만나보고 일본인들까지 도움을 받아 내용을 보태기도하고 수정하기도 했습니다. 사람의 기억에는 한계가 있어 실제 겪은일도 날자에 대해 착각하기도 하고 본인이 처한 환경에 따라 증언이 서로 다르기도 합니다. 다른 것은 다른 데로 밝히고 객관적인 법원의 판결문 등 증거자료를 근거로 저자의 의견을 첨부 합니다.
윤동주가 독립운동으로 일본 감옥에서 생을 마쳤다는 가족들의 진술을 많은 사람들이 믿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시인이자 학생에 불과한 젊은이가 독립운동으로 체포 구금되고 감옥에서 죽기까지 한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는 것인데 일본인의 도움으로 일본법원의 판결문을 입수하면서 사실이 명백히 들어난 것입니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30일 중국길림성 명동촌에서 명동학교 교원이던 윤영석의 장남으로 태어납니다. 조부 윤하현은 부유한 농부였으며 기독교 장로였으며 그 지역에서는 명망 있는 어른입니다. 가부장 제도가 엄격하던 그 시대에 아버지의 역할이 절대적입니다. 문학을 하겠다는 윤동주와 의과대를 진학하라는 아버지와의 의견 충돌로 윤동주는 집에 잘 들어가지도 않고 단식으로 버티고 있을 때 할아버지가 윤동주를 지지하며 문과를 가서 법관이 되라고 합니다. 법관이 되려면 법대를 가야하는 데 할아버지가 잘 모르고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과 같이 한 인간이 성장하고 소멸하는 과정에서 주위의 많은 사람들의 영향을 직, 간접적으로 받습니다. 윤동주를 알려면 그의 동갑내기 고종4촌 형 송몽규를 알아야 합니다. 윤동주의 출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전 생애에 걸쳐서 집요하게 두 사람은 연결된 삶을 살았습니다. 윤동주는 송몽규를 보면서 늘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지금은 송몽규에게 뒤처지지만 나중에는 너를 따라잡는 다는 오기를 말 할 정도로 송몽규는 윤동주 보다 한발 앞서갔습니다.
은진 중학생이던 송몽규는 193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콩트부분에‘숟가락’이란 작품이 당선됩니다. 그해 4월에 중국 낙양군관학교 한인반 2기생으로 입교하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다음해인 1936년 제남에서 일경에 체포됩니다. 이때부터 계속 요시찰 인물로 감시를 당합니다. 가정이지만 윤동주가 송몽규를 만나지 않았으면 평범한 문학도로서 생을 마쳤으리라 생각합니다.
송몽규와 가까웠다는 이유로 일본경찰에 체포된 사람이 윤동주와 고희욱이 있습니다. 고희욱은 살아있으며 이 책의 저자 송우혜와의 만남을 가졌습니다. 송몽규와 같은 집에서 하숙을 했고 몇 번 밥을 같이 먹었다는 이유로 고희욱은 체포되었다고 합니다. 고희욱의 증언에 의하면 형사들이 계속 미행하여 일거수일투족이 다 기록되어있는 문서를 보여주면서 자백하라고 강요했다고 합니다. 단지 요시찰 인물과 밥을 먹고 한집에 하숙을 했다는 이유로 잡혀 들어갈 정도라면 당시 일본이 불순분자 체포에 얼마나 혈안이 됐는가를 보여줍니다. 다행히 담당 일본 검사가 고희욱의 고교선배라는 인연과 밥같이 먹고 대화 몇 번 나눈 것에 불과하여 고희욱은 검사의 불기소 처분으로 석방되었지만 그 일로 인해 학교 졸업도 못하고 자신의 앞길이 엉망이 되었다고 후회합니다.
시인으로 이름을 날리자면 우선 좋은 시를 써야하고 그 시를 누군가 세상에 널리 알려줘야 하고 독자의 공감을 얻어야 합니다. 암흑기에 사상범의 글을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위험한 일입니다. 윤동주의 국내 유품과 그간의 시를 보관한 친구 강처중이 있습니다. 강처중도 신변에 불안을 느껴 일본서 윤동주의 편지가 오면 편지내용에서 시만 오려서 보관하고 편지는 없앴다고 합니다. 강처중은 해방 후 경향신문사의 기자로서 윤동주의 과거 시들을 보관하고 신문에 발표하고 유족에게 돌려주었습니다. 만약 강처중이 이런 일을 하지 않았다면 윤동주의 시는 후일 빛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강처중은 6.25사변 이후 남로당 간부로 체포되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은 물론 공로도 지워졌습니다,
한 민족이 다른 약한 민족을 지배하려하고 한 나라가 다른 약소국가를 짓밟는 행위는 결코 성공하지도 못하면서도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 가는 대동아 전쟁은 무모한 짓이라고 울면서 취조형사에게 항변합니다. 하지만 현실을 인정하며 진술서에 서명을 하는 윤동주와 그 진술서를 찟어 버리는 송몽규의 극명한 성격차이를 느낍니다.
지금 살아있는 위안부 할머니들이 자신들이 겪은 사실을 증언하는 데도 아니라고 억지를 부리는 일본이라는 나라를 개탄합니다. 나라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끼게 한 '윤동주 평전'을 읽으며 눈물짓습니다. 우리세대와 시대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느끼지 못하는 임진왜란 때도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죽음에 내 몰렸을 까요. 국가가 무너지면 백성이 받게 되는 고초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굳건히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나라를 위해 숨져간 선각자들의 행적을 알아보면서 각오를 새롭게 합니다.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이들에게 토속 음식을 (0) | 2016.03.14 |
---|---|
인간은 필요 없다. (0) | 2016.03.14 |
모던보이 백석을 찾아서 (0) | 2016.03.02 |
솔로몬의 지혜도 내 눈에는 지혜도 아니다 (0) | 2016.03.02 |
오래 살려면 남과 다투지 마라 (0) | 2016.03.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