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환 선생의 묘는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 산36번지에 있다. 민영환 선생은 누구인가? 1905년 국권침탈의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조약에 찬동한 5적의 처형과 조약의 파기를 상소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에 죽음으로 항거하여 국민을 각성하게 할 것을 결심하고 국민과 각국 공사 그리고 고종에게 고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한 애국지사이다.
선생이 자결한 1905년은 일본의 세력이 한반도를 지배해오던 시대였으므로 선생의 묘소는 초라하리라 생각한 내 생각이 완전히 빗나갔다. 비교적 넓은 부지에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다. 이제 마북리는 도시의 한복판에 가까운 위치다.
1942년 후손들의 노력으로 이 장소에 이장되고 제대로 관리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경기도 기념물 제18호로 지정되어 지자체의 보호가 더해져서 완벽하게 관리되고 있다. 묘를 보호하는 울타리도 견고하고 잔디도 알맞게 잘 정리되어있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보람된 일을 한 영웅들을 묘소가 제대로 관리된 것을 보는 것 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선생은 명성왕후의 조카로서 당상관이 될 만큼 권력의 단맛을 충분히 맛본 실세였다. 또한, 일본, 미국, 영국 등 여러 나라를 방문하여 우리나라 사람으로 세계 일주를 한 최초의 인물이다. 제복을 입은 선생의 모습이 교과서에도 실려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선생의 정확한 생애의 기록은 몰라도 어렴풋이 선생의 모습은 대부분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다.
"아 나라와 백성의 치욕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구나. 생존경쟁이 격심한 이 세상에 우리 백성의 운명은 장차 어찌 될 것인가. 죽어야 할 때 구차스레 살기를 바라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어야 할 때 죽기를 기약하는 자는 살아날 수도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어찌 모르랴. 나는 지금 죽지만 혼(魂)은 죽지 아니하여 지하에서나마 여러분을 돕고자 한다."라는 유서를 남겼다.
선생이 자결한 이듬해 봄, 피 묻은 옷을 간직한 방에서 푸른 대나무가 돋아났다고 하며 선생의 피를 먹고 자란 대나무라 하여 혈죽(血竹)이라 하고 잎이 45개인데 선생의 돌아가실 때 나이 45세와 딱 맞아 신기하다고 했다. 일본은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대나무를 뽑아보았으나 어디에도 뿌리가 없어 피를 먹고 자란 것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역사가 있는 민족은 망하지 않는다. 오늘 방송에서 일본이 독도는 자기들의 영토라는 동영상을 만들어 인터넷으로 전 세계에 유포하는 못된 짓을 하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일제에 항거하다가 유명을 달리한 선조들의 얼을 기억해야 한다. 위안부라는 엄연한 사실을 왜곡해서 "자발적이지 강제성은 없었다"거나 "자의에 의한 위안부 생활" 등의 궤변을 늘어 놓고 있다. 마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고 ‘하늘 없다.’ 라는 형국이다.
우리나라는 오랜 역사가 있는 나라이므로 곳곳에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유물이나 기념물이 많다. 우리가 후손에게 물려줄 고귀한 자산이며 장차 관광자원도 될 수 있다. 이런 역사의 증빙자료들이 어떤 사유로든 내팽개쳐져 점차 잊혀가는 것을 볼 때 가슴이 아프다, 후손의 노력과 지자체의 협력으로 이렇게 잘 정리 정돈된 민영환 선생 묘소를 보면서 마음 든든하고 기분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