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름살이 자랑스럽다
거울 앞에 선다. 거울속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초로(初老)의 늙은이의 주름살과 축 쳐진 눈두덩하며 반백의 머리숱이 마음에 안 든다. 애써 손가락 다리미로 얼굴의 이곳저곳을 문질러 보지만 금방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간다. 무심한 세월 탓을 하려다 말고 어제 본 암환자의 투병기를 떠올리며 복에 겨운 투정이라고 놀라며 지금껏 잘 살아 온 지난 세월에 대해 감사하고 또 감사한다.
방송에서 암 환자인 젊은 엄마 두 사람의 투병기를 방송했다. 너무 슬퍼서 펑펑 울었다. 암 환자를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기록한 영상이다. 투병중인 암환자는 살고 싶어서 수술대에 오르고 엄청난 치료의 아픔을 참고 견디지만 암이란 놈은 여기서 저기로 전이하면서 점점 퍼져가며 생명을 갉아 먹는다,
암 환자가 삶에 대한 끈을 놓지 않고 어떡하던 살아보려고 발버둥 친다. 정확한 대사는 다 기억하지 못하지만 머릿속에 남아 있는 환자의 말을 인용해보면 이렇다.
‘얼굴에 주름도 지고 머리도 하얗게 될 때까지 정말 살고 싶어요!’
‘중학교 교복을 입은 딸아이가 얼마나 이쁘겠어요!, 그 모습을 보고 싶어요. 아니 초등학교 입학할 때까지 만이라도 내가 살아서 엄마노릇을 해주고 싶어요!’
‘아이 아빠가 잘 해준다고 하지만 딸아이는 아빠가 도저히 못해주는 엄마만이 해줄 수 있는 일이 있어요. 그 일을 엄마인 내가 해줘야 하는데! 해줄 수 없다는 것이 아이한테 너무 미안해요’
‘의사 선생님 저는 앞으로 석 달은 더 살 수 있을 까요?’
“그건 장담 못해요, 더 당겨질 수도 있어요. 더 이상 치료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어요. 호스피스 병동으로 가야해요.
‘여보 내가 3개월을 못 넘긴다고 하잖아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 하루라도 더 함께 있고 싶어요. 내 딸에게 엄마의 추억을 남겨주고 싶어요.’
이 방송을 보면서 살아있다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이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오늘은 동쪽에서 해가 떠서 서쪽으로 지는 단순한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어제 죽은 사람이 그토록 살고 싶어 했던 오늘이라는 엄연한 현실이다. 혹자는 늙어 추한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어느 정도 예쁜 본인의 모습이 있을 때 죽고 싶다는 말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말이 어제 죽은 사람에게 얼마나 철없고 얌통머리 없고 얄미운 말이었든가!
이번에 서울 대형병원에서 신생아가 집단으로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세상에 태어나 엄마의 얼굴도 못 알아보고 저세상을 간 아이들이 너무 가엾다. 부모의 이혼으로 학대받다가 죽어간 어린 영혼은 얼마나 애달파할까! 세월호 선박 해상 사건 때 갓 피어오르는 꽃봉오리 같은 아이들이 발밑에서부터 물이 차오르는 공포를 느끼며 숨이 막혀 죽어갔다. 이런 모습들을 상상해보면 우리는 지금까지 별 탈 없이 여기까지 살아온 것에 대해 고마워 해야 할 사람이 너무 많다.
부모님으로부터 건강한 육신을 물려받은 것이 너무 고맙고 부모님의 사랑으로 상처 없이 성장한 것도 기쁘다. 별로 아프지 않고 여기까지 살아 온 것이 너무 행복하다. 얻어먹을 힘만 있어도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하지 않는가! 소똥 밭에 뒹굴어도 이승이 저승보다 낫다고 한다. 살아있음에 대해 감사하며 열심히 살아야 한다. 그것이 죽은 사람에 대한 보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