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월남 참전 용사를 잊지 말자.

조왕래 2013. 6. 18. 12:33

월남 참전 용사를 잊지 말자


월남 파병 용사인 그는 지금 60대 중반으로 경상북도와 강원도의 접경지대에서 태어났다. 대학을 다니다 군에 입대하여 월남에 출병하여 1년 6개월 월남 전투 생활을 했다. 보통 1년이면 월남에서 귀국하는데 본인 말로는 탁월한 전투 능력을 인정받아 대대장이 귀국을 어찌 저찌 저지하여 6개월 더 근무하게 되었단다.

 

그는 지금은 1인 기업가로 프리랜서 일을 열심히 한다. 과거 공기업에서 고급 간부를 역임했지만 지금 1인 기업에서는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한다. 자격은 대한민국 최고의 기술자격인 기술사와 지도사 자격증을 갖고 있다. 다른 잔챙이 기술자격은 많지만 누가 들먹이면 웃어버린다.

 

1인 기업은 영업부터 업무 수행은 당연하고 결과물 작성과 뒷수금등 혼자서 다 해야 한다. 1인 기업은 비용절감을 우선시해야 하는 이유로 해당 분야에 밝은 시니어 창업으로는 우선 고려해 볼 대상이다. 다만 처음 할 때는 준비나 고객 확보와 과실이 바로 나오지 않는 어려움이 있다.

 

이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재취업하는 경우도 많이 봤다. 그는 이젠 궤도에 올라 단골도 상당하고 수입도 짭짤하다. 실무에 밝기 때문에 여기저기 호출당하며 나이 많음을 잘 극복하고 있다. 오늘 함께 술자리 하면서 자신의 프라이드에 대단함을 새삼 느꼈다.

 

월남전에서 죽음의 고비를 여러 번 넘기면서 세상을 관조하는 바탕이 생긴 것 같다. 프리랜서 일을 하면서도 가격 경쟁은 하지 않고 오로지 기술 경쟁만 해 왔다고 한다. 지금 불만은 월남 파병 용사들이 조국의 자유수호 명령으로 참전한 사람들을 너무 쉽게 잊는다는 아쉬움이다.

 

오늘 술자리에서도 점잖게 주인을 불러 6월은 호국의 달이라며 월남 참전증을 내보이고 냉수라도 한잔 서비스로 달라고 한다. 그의 눈빛에 자유를 신봉하기 위해 싸워온 늙은 노병의 안타까움이 배어난다. 팔뚝을 걷는데 총상의 흔적이 역력하다. 남들이 장애인 등급을 받으라고 등을 떠밀었지만, 본인은 한사코 손을 내 저었다고 한다.

 

지금 사회에서 당당히 살아가는데 무슨 국가의 혜택을 더 바라느냐는 거다. 월남 참전과 조국 근대화는 아무리 쉬쉬해도 관련이 있다. 이분들이 있어 조국 근대화는 앞당겨졌다. 6월은 호국의 달이라는 말은 하면서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망각하고 있다. 아쉬운 대목이다.

 

오늘 함께 한 술집에 미국의 금문교 흑백그림이 걸려있었다. 금문교 그림을 보며 금난교 북단에 한국참전기념비가 있는데 꼭 가봐야 한다는 것이다. 6‧25 사변 때 미군이 우리나라에 와서 전사한 젊은 청년이 5만 명이나 된다고 하며 그들이 왜 우리나라에서 죽었는가? 기억해야 한다고 한다.

 

남의 나라 땅의 자유를 지켜주기 위해 피를 흘린 고마움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물론 월남전에서도 죽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많다. 최근 방송에서 월남전 때 월맹군에 포로로 되어 북한에 끌려간 납북 병사도 있다고 한다. 20대의 병사가 지금은 60이 훌쩍 넘어있다. 6‧25때 납북자 보다는 젊은 사람들이다.

 

국가에서 귀국을 서둘러 줘야 한다. 지금도 월남 파병 용사 중 일부는 부상에서 또는 고엽제의 피해에서 신음하고 있다. 그들은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조국의 부름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 그들이 있어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한다.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나라의 젊은이를 사지로 몰아가는 용병은 안 된다고 열을 올리든 애국 애족 사람들이 올해는 현충탑에 참배는 했는지 묻고 싶다. 입으로만 호국의 달이라고 외치지 말고 이웃의 참전 용사에게 고마움의 눈인사라도 보내자.

 

 <시니어리포터 조왕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