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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들수록 밀가루처럼 살고 싶다

조왕래 2017. 12. 12. 12:53

 

 

밀에서 밀가루를 만들고 밀은 밀밭에서 생산된다. 밀가루를 손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어본다 아무런 맛이 없다. 하지만 빵을 만들면 빵의 맛을 내고 수제비를 만들면 수제비의 맛을 낸다. 밀가루에 설탕을 넣으면 달달하게 바뀌고 소금을 넣으면 짭짤하게 변한다. 자신의 고유의 맛을 고집하지 않는다. 자신을 죽이고 밖에서 들어오는 외부의 맛을 살려준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한다는 말과 같이 상황에 가장 잘 적응하는 것이 밀가루다.

    

마늘이나 생강은 아무리 잘게 부수어도 끝까지 고유의 맛을 주장한다. 양념으로는 지조가 있다고 추켜 세워주고 환영받지만 어울려 살아야하는 인간세상에서 자신을 강하게 주장하는 것은 미생지신(尾生之信)에 불과하다. 사랑하는 여자와 다리 아래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만 믿고 소나기에 물이불어 죽어가는 자신을 돌보지 않은 무모에 가깝다. 밀가루처럼 잘 적응했으면 미생은 다음날 애인을 만났을지도 모른다

    

하얀 밀가루에 푸른 잉크 한 방울 떨어뜨려본다, 금세 파랗게 변한다. 붉은 잉크를 떨어뜨리면 잉크가 닺는 속까지 붉게 변한다. 밀가루의 원래색인 흰색은 없어진다. 한 바가지의 밀가루가 절반의 잉크 물에 변색(變色)하는 것을 두고 의리 없고 상종 못할 변절(變節)이라 부르고  세상 사람들은 그 가벼움을 욕하지만 변해야 할 때는 변해야 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가을이 되어도 단풍이 되지 않는 소나무보다 변하는 단풍나무에 더 많은 사람이 몰려온다.

    

밀가루의 접착력은 으뜸이다. 천장의 종이도 벽지의 종이도 때가 타서 수명이 다할 때까지 묵묵히 접착의 일을 수행한다. 죽으면 죽었지 헤어질 수 없다고 부부의 연을 맺은 사람도 살다보면 더러는 싸우기도 하고 헤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밀가루 풀 발린 종이는 천정이던 벽이던  장소를 가리지 않고 평생을 살아도 의견이 맞지 않는 날이 없이 붙어있다. 사람들처럼  티격태격하며 떨어지는 모습을 못 봤다. 천생연분을 모르면 소리 소문 없이 붙어 지내게 만드는 밀가루 풀을 보고 배워야 한다.

    

밀가루음식은 값이 싸서 요기로 배를 채우려는 노동자들에게 환영받는 음식이다. 어느 시장에 가도 밥보다 국수가 싸다. 영양을 위해 계란이나 맛을 위해 팥 앙금을 넣지 않고 밀가루만으로 식용 빵을 만든다면 세상의 어느 떡보다 빵이 싸다. 밀가루의 글루텐 성분이 건강을 해친다고 기피하는 사람이 있지만 모든 사람에게 해악을 끼치는 것이 아니고  그런 유전인자를 갖고 있는 사람만 조심하면 된다. 경찰이 있어도 문단속은  해야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보통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적당히만 먹으면 질병과는 관계없다

    

밀가루의 전신인 밀은 멋과 낭만이 있다. 밀은 보리보다 키가 한 뼘이나 큰 멋진 신사다. 삼사월 봄바람에 일렁이는 밀밭을 보면 미녀와 왈츠 춤을 추는 신사의 얼굴이 스쳐간다. 밀로 술을 담근다. 술은 고달픈 인생길에서 만나는 오아시스다. 과하게 먹지만 않으면 인생의 윤활유요 고통스러운 삶의 진통제다.

    

나이 들면서 밀가루처럼 살고 싶다. 언제 어느 자리에 가더라고 그 자리에 융화 할 수 있는 포용력 있는 삶이 되어야 시니어의 삶이다. 부러질지언정 고개는 숙이지 않겠다는 객기를 부리던 젊은 시절은 이미 흘러갔다. 봄바람에도 그 큰 키로 일렁이다가 가난한 도시노동자의  한 끼 식사도 되고 고급스러운 생일케이크로 메인테이블에 오르는 호사도 누리는 나는 밀가루처럼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