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에 후각이 예민한 k가 있다. 누가 신발만 벗어도 귀신같이 알아맞히고 방구만 뀌어도 코를 막고 밖으로 나가거나 책받침으로 부채질하며 인상을 찌푸린다. k는 멀리서도 누가 담배를 피우는지 오늘 식당메뉴가 무엇인지를 알아맞힌다. 후각이 예민해 꽃향기를 남들보다 더욱 정확히 맡으며 느낀다는 것은 행복이다. 아주 작은 참기름 한 방울로도 고소한 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것은 재능수준이다. 무엇이 타는 냄새나 불결한 냄새를 남들 보다 먼저 맡음으로써 서 위험에서 빨리 도망가거나 위험 요인을 제압할 수 있는 것은 분명 장점이다.
처음에는 이런 사냥개코를 가진 k가 부러웠다. 하지만 옆에서 지켜보니 동료들한테 서서히 기피인물로 꼽히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몸에서 땀 냄새가 난다고 슬쩍 자리를 피하거나 손에서 냄새가 나니 씻고 오라는 등 지적 질을 하기 때문이다. 남들은 대수롭지 않게 느끼는 냄새도 예민한 k에게는 참기 어려운 고통인 것은 분명하다.
식도락가 p씨가 있다. 내가 먹어보면 똑같은 된장찌개의 맛을 약간 다르다며 특이점을 장황하게 설명한다. 맛있는 음식을 찾아서 보통 100리길도 마다하지 않는다. 서울서 비빔밥을 찾아 대전까지 간다. 처음에는 p씨 덕에 제법 먼 거리의 이런저런 음식점을 찾아다니며 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절대 맛의 차이를 족집게처럼 집어내는 p의 재주에 탄복하기도 했다. 하지만 차차 시간이 지나면서 이정도 음식 맛의 차이로 이 먼 거리를 올 필요가 있느냐는 회의감과 가격대비 성능비용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더 참기 어려운 것은 음식이 마음에 안들 때 (대부분 사람은 잘 먹고 있는데도) ‘이런 맛없는 음식을 식충처럼 꾸역꾸역 먹는 것은 고통’이라느니 ‘왜 훌륭한 재료로 이렇게 맛없게 만드느냐’는 등 음식타박을 한다. 옆에서 잘 먹고 있는 사람까지 음식 맛이 싹 달아나게 만들 때는 한 대 쥐어박아버리고 싶었다. 단호하게 내가 소리쳤다. ‘다시는 우리 앞에서 음식타박하지마라! 맛없으면 너 혼자 조용히 숟가락 놓고 나가라!’
눈이 좋은 사람은 안경도 안 끼고 참 좋을지 알았다. 아니란다. 그냥 넘어갈 작은 흠도 눈에 잘 뛰어 오히려 불편하다고 호소하는 사람을 보면 어안이 벙벙해진다. 모기에 다 같이 물렸는데 어떤 사람은 피부가 너무 예민하여 한참을 긁어대어 피부가 빨갛게 부어오르는 사람도 있지만 대수롭지 않게 모기만 손으로 날려 보내고 하던 일을 계속하는 촉감이 둔한 사람도 있다. 인체가 느끼는 오감이 너무 둔해도 문제가 있지만 너무 예민해서 스스로 고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볼 때면 처음에는 이해를 못했는데 점차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렇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진짜 문제는 라디오 볼륨처럼 소리가 크면 소리를 줄이듯이 큰 소리를 적게 듣는 장치가 인체에는 없다는 것이 문제다. 눈이 잘 보이지 않으면 안경을 쓰면 되지만 잘 보이는 눈을 나쁘게 만들 수는 없다. 잔소리할 나쁜 것이 눈에 뻔히 보이는데도 못 본 척 참고 넘어가는 것도 고통이다. 귀도 마찬가지다. 소리가 잘 들리지 않으면 보청기를 착용하면 되지만 너무 잘 들리어 못 들어야 할 흉보는 소리까지 들어서 마음의 상처를 받는다. 그렇다고 귀마개를 매일 하는 것도 불편하다.
나이 들면 오감이 둔해진다. 알고 있는 지식이 있고 경험이 있는데 거기다 나이에 비례하여 오감마저 발달되어간다면 매일 싸워야 하거나 혼자서 화를 참느라고 씩씩대야 한다. 오감이 둔해진다고 너무 걱정할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