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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 산소에 대한 질문과 답

조왕래 2017. 12. 7. 10:24

    

추석이다. 일가친척 가족들이 모이면 조상을 떠 올릴 시간이다. 돌아가신 조상은 묘지를 갖고 있다. 방송에서 공원묘지의 약 30%가 무연고 묘지로 임대료를 내지 않고 무단점유상태로 되어있어 골치를 앓고 있다고 한다. 후손이 있는지 없는지 확실치 않지만 연락을 해도 우편물이 반송되어 오거나 반응이 없다고 한다. 벌초를 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무덤의 일부가 훼손되었는데도 그대로 방치되어있다고 한다. 이것은 이제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대부분의 우리세대가 걱정하고 있는 대목이다. 내가 죽고 나면 조상님들의 산소뿐만 아니리  내 산소의 운명은 어찌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있다

    

장례문화는 민족에 따라 전통이 있다. 우리나라는 시신을 직접 땅에 묻거나 화장 후 땅에 묻는  매장 문화지만 다른 나라는 조장, 풍장, 등 여러 가지가 있고 화장 후 바다가나 강 또는 산에 뿌리는 산골(散骨) 문화도 있다. 매장은 묘지관리가 필연적으로 어려움이다. 후손이 끊어지거나 아랫대가 길게 내려가면 저절로 잊혀 진다. 후손들에게 잊혀 지면 산소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다가 점점 작아져서 나중에는 흔적이 없어진다.

 

사라져가는 묘지를 많이 보고있다.  아무도 찾지 않아 잡초로 우거진 묘를 집안 산소 벌초하러 다니다 발견하면 자손이 끊어진 묘라고 애석해 하며 불쌍하다고 대신 벌초도하고 술 한 잔 올리고 자손을 대신하여 절도 해주고 했다. 이제는 도시생활에 바쁘다보니 남의 묘를 돌봐주는 것은 고사하고 직접 자기 조상묘의 벌초도 제대로 챙기지 않는 사람들이 많고 점점 그 숫자가 늘어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

    

무덤을 영원히 보존하고 관리하는 것은 국토의 효율적인 관리 측면에서도 불합리하다. 절대 권력자인 왕의 무덤이거나 하늘이 내려준 효자가 있지 않는 한 그 무덤이 계속 보존 될 수가 없다. 명심보감에도 사람이 백년 살기 어렵고 죽어 그 무덤을 백년 보존하기 어렵다고 했다. 현실적으로 비싼 땅값으로 묘지를 구하기도 어렵고 해마다 벌초나 산소의 보수 등 관리하기도 힘들다.

    

산소관리는 전통적 의식과 관계가 아주 깊다. 이를 살펴 볼 좋은 자료가 고려시대의 제상 윤관의 묘지 사건이다. 고려시대는 모계 사회여서 부계조상에 대한 인식이 강하지 않았다. 혼인풍습에서도 남자가 처가에서 일정기간 사는 남귀여가혼이 널리 행해졌고 남자가 처가 쪽에 거주하다가 처가 쪽 묘역에 안장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러한 상황은 부계 조상의 묘가 여기저기 흩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원대조상의 분묘는 몇 세대가 지나지 않아 이름 모를 고총이 되고 세월과 함께 잊혀 버렸다. 그런데 유교이념을 세운 조선시대에 와서 부계의식이 강해지면서 사람들은 부계조상의 묘를 단장하기 시작했다. 권력이 있는 집안일수록 더 강하게 조상의 묘를 찾는 사회적 큰 흐름이 있었다.

    

윤관은 파평 윤씨였고 파평 윤씨도 조상의 묘를 찾기 시작했다. 윤관의 후손이 조상 묘를 찾았지만 불행하게도 청송 심씨 땅에 윤관의 묘가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청송 심씨 심지원의 묘 바로 아래쪽이었다. 심지원은 효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다. 무덤은 먼저 쓴 사람의 기득권이 있지만 심지원의 아들 익현은 효종의 딸 숙명공주와 혼인한 관계이며 효종이 승하한 후 다음 왕인 어린 현종을 보좌하는 위치에 있는 막강한 권력의 심씨 가문에서 호락호락 들어줄 리가 만무했다. 두 집안의 대립은 곧 법적 소송으로 발전하였다. 일차적으로 분묘가 위치한 고양, 파주 교하에서 진행되었으나 세 고을 수령이 차례로 소송인과 인척관계라는 점을 내세워 기피하는 바람에 해결을 보지 못했다. 결국 경기도 관찰사를 거쳐 조정에까지 파급되어 양쪽 집안의 목숨을 건 싸움으로 전개되었다. 결국 왕인 영조가 윤관과 심지원의 묘에 모두 제사를 하사하면서 묘를 수호하라고 명하였다.

    

양쪽 집안에서는 비록 왕의 명령이지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분묘로부터 문무 관료이며 1품의 벼슬을 한 영의정은 사면 각 90(124.7m)  2품의 경우 80보 생원, 진사의 경우는 40보를 정해주며 그 안에 다른 사람이 묘를 쓰지 못하도록 되어있다. 그 뒤 풍수지리의 영향으로 좌청룡 우백호의 산세 안에는 다른 사람이 묘를 못 쓰게 했으니 묘가 차지하는 면적이 더욱 방대해졌다. 윤관의 묘와 심지원의 묘는 재상으로서 함께 하기는 너무 가까웠다

    

왕은 명망 있는 가문 출신인 두 사람이 소송에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대립하여 조정을 어지럽히는 상황에 매우 진노했다. 1765년 윤23일 깊은 밤 경희궁 흥화문에 도착한 영조는 심정최와 윤희복을 친히 심문하고 형장을 가한 후 유배형을 명하였다. 일흔 살이 넘는 노구의 두 사람은 형장을 맞아 망가진 몸을 이끌고 귀양길에 올랐다. 결국 윤희복은 귀양길 도중 사망하였다. 가문의 명예를 위해 왕의 진노까지 사면서 죽음도 마다하지 않고 그들은 다투었다.

    

유배를 당하고 죽음에 직면한 상황에서도 두 집안의 분쟁은 해결될 기미가 없었다. 산송은 조상 묘를 수호하고자하는 위선의식(僞善意識)과 함께 가문의 모든 구성원이 참여하여 필사적으로 저항하였다. 그 때문에 왕권으로도 이를 진정 시킬 수가 없었다. 두 집안의 산송은 대를 이어가며 계속되다가 2010년 윤씨 측에서 이장 부지를 제공하고 심씨 측에서 심지원의 묘를 이장함으로써 250여 년 만에 극적으로 해결되었다.  

    

지금은 이렇게 우리의 의식에 강하게 남아있던 유교문화가 옅어지고 사라져 간다. 조상의 묘를 수호하고자 왕권에 도전하거나 목숨을 내 놓는다는 것은 무모하다는 평을 들을 것이다. 죽은 사람을 위해 산 사람이 귀양도 마다하는 모습은 이제는 찾아 볼 수도 없다. 조상무덤은 관리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애물단지로 변해가고 있다.  

    

아들이 없어서 산소를 관리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하거나 자기 소유의 산이 없는 사람들이 화장하여 산골이라 하여 바다에 뿌리거나 산이나 강에 뿌리기도 했다. 영국의 처칠수상의 유골은 바다에 뿌렸다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산골은 법률로서 금지한다. 결국 납골당이 대안으로 떠올랐지만 유골의 아파트 같은 모양도 그렇고 관리를 잘못하면 벌레도 나온다고 한다. 산 사람의 아파트도 차고 넘치는데 죽은 사람을 위해 납골당이 계속 늘어나는 것도 안 될 말이다. 수목장, 잔디장이 대안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아직은 미미하다.

    

모든 화장터가 다 그런지는 모르지만 어느 화장터에는 유골을 두고 가면 여러 사람의 유골을 한데 모아 땅에다 묻어버리는 일을 대신 처리해주기도 하는 모양이다. 이런 집은 당연히 조상의 묘가 없다. 누군가 산소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면 화장터에 두고 왔다는 말을 못하고 얼버무린다. 아직까지 우리의 정서는 이런 행위를 용인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결혼이 늦어지고 덩달아 출산도 늦어지는 추세제만  반면 수명이 늘어나서 할아버지 까지는 얼굴도 알고 직접 대면의 경험들이 있다. 얼굴도 못 본 조상의 산소를 계속 관리하는 것은 생각해볼 문제다 .수목장이나 잔디장을 대안으로 내어놓고 관리는 할아버지, 할머니대까지 하는 것으로 모든 제도가 만들어 졌으면 어떨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