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어느 자리에서 맥아더 장군의 이야길 끄집어냈다. 맥아더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1년 7월에 그의 나이 61세에 예비역에서 소집되어 다시 현역으로 복귀하고 그의 나이 70세에 유엔군 사령관으로 인천상륙 작전을 감행하였으며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미국의 군사제도보다는 나이 들어도 화려한 전공을 세운 맥아더의 행적이 나이가 든 시니어의 귀감이 되기 때문에 시니어 교육장에서 자주 인용되는 장군이다.
우리의 정서는 이미 퇴직한 사람을 특별한 경우 아니면 다시 부르지 않는다. 이러한 우리의 정서 바탕에서 과연 맥아더는 무슨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어떤 자질이 있어서 현역으로 복귀하게 되었는가를 토론하고 싶었고 내심 지금 우리가 최선을 다하는 것이 장래를 보장받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면 의미 있는 토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첫 단추부터 이상하게 토론이 흘러갔다. 내가 우리의 정서상으로는 퇴역한 사람이 다시 임명되기 어렵다는 점을 이야기하자 어느 한 사람이 즉각 반박하고 나섰다. 박정희 전 대통령도 군 시절 예편되었다가 복직이 되었다며 군인이 예편했다가 다시 복직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도 예가 있기 때문에 우리의 정서상 맞지 않는다는 말은 틀린 말이라는 거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빨갱이로 몰려서 강제 퇴역을 당했다가 억울하다고 사면을 받아 복직한 것이기 때문에 사정이 좀 다르다. 그것보다 퇴역 후 복역은 오늘 토론의 주제가 아니고 토론을 이끌어 내기 위한 끄나풀에 불과하다. 갑자기 토론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장미꽃은 붉은 꽃도 있고 푸른 꽃도 있는데 어떡하면 색깔을 바뀌게 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푸른 꽃은 없고 분홍 꽃은 있다며 과연 푸른 꽃이 있느냐 없느냐의 논쟁만 하는 꼴이 됐다. 나이가 들면 입은 닫고 지갑은 열어야 대접받는다. 즉 남의 말을 경청(傾聽)해야 한다.
남의 말을 끝까지 들어보고 질문의 요지를 알고 답을 해야 하는데 질문의 앞 구절만 갖고 본인의 해박한 지식을 뽐내려 한다. 남의 말을 귀담아듣는 경청이라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다. 경청을 잘하는 것도 훈련이 필요하다. 불쑥 말이 튀어나오려 할 때 침을 꿀꺽 삼키고 참아야 한다.
상대의 말의 도입부만 들어보고 지래 짐작으로 이럴 것이라고 답을 하거나 상대방 말에서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상대의 말을 끊고 말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때도 참아야 한다. 그 순간 간단히 메모하면서 듣는다면 상대는 나에게 더 호감을 느낀다.
한 템포 늦추는 여유를 부리자. 불과 1~2분이다. 눈으로 미소로 우선 답을 하자. 같이 대화하면 즐거운 사람이 있고 짜증이 나는 사람이 있다. 나이 들수록 말을 아끼고 남의 말을 끝까지 들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