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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미륵사지를 가보다

조왕래 2019. 1. 3. 16:58

거대한 미륵사지를 가보다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에 있는 백제시대의 절터 미륵사지에 가보고 웅장한 크기에 우선 입을 딱 벌렸다. 13384699라고 한다. 이만큼 큰 절을 본 적이 없다. 미륵사는 백제 제30대 무왕 때 창건된 것으로 보이는 백제 최대의 사찰로, 언제 없어지게 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조선시대에 들어 17세기경에 폐사(廢寺)된 뒤 서탑(西塔) 및 당간지주(幢竿支柱) 등의 일부 석물만 남았으며, 사역(寺域)은 경작지와 민가로 변하여 오늘날까지 내려왔다고 문화재 해설사가 설명한다.

 

    

 

미륵사는 통일신라시대에도 거대한 불교사원으로 번창했으며 고려시대에도 중요한 불교사원으로 존재했다. 조선의 불교 억압정책에도 명맥을 유지해 왔지만 임진왜란 이후인 17세기 이후부터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역사에서 사라졌다. 미륵사지에대한 본격적인 조사와 연구는 1970년대 이후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 결과 미륵사의 전체규모와 가람배치가 확인되었고 20,000점이 넘는 문화재가 발견되었다. 특히 20091월 미륵사지 석탑의 보수 과정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는 미륵사의 건립배경과 백제불교문화의 우수성을 새롭게 확인시킨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미륵사지석탑(국보 11)200110월부터 해체·보수작업 및 보구 정비를 하고 있다. 문화재청 산하 국립문화재연구소가 2009114, 이탑의 탑신 1층 심주(중앙기둥)를 해체·조사하는 과정에서 미륵사지의 창건 년대와 창건주를 기록한 사리봉안 기록판과 금제 사리 항아리 등 유물 500여 점을 발굴했다. 이를 통해 미륵사는 무왕 재위 40년인 서기 639년에 백제인 왕후의 발원으로 건립된 사실이 확인되었다.

    

금판 앞뒷면에 194자로 된 사리 봉안 기록판에는 시주자의 신분이 무왕의 왕후로, 좌평(백제의 최고 관직)인 사택적덕의 딸이라는 사실이 새겨져 있다. 이는 백제 서동 왕자(무왕)가 향가 서동요를 신라에 퍼뜨려 신라진평왕의 딸 선화 공주와 결혼했으며, 그 뒤 선화 공주가 미륵사를 건립했다는 삼국유사의 내용과는 다른 것이어서 논란이 되고 있다.

    

 

우리일행을 안내한 해설사는 비교적 젊은 분으로 성격도 활달하고 첫눈에 봐도 미인이다. 보조 가이드로 해설을 하다가 오늘 드디어 단독해설자로 데뷔하는 뜻있는 날이라고 소개한다. 그러니 혹 틀리더라도 너그러이 이해를 해 달라고 먼저 부탁을 한다. 나이든 문화재 해설사 들이 자신의 허락 없이 사진 찍히는 것을 싫어하는데 이분은 전연 내색을 하지 않는다. 문화재에는 설명문이 붙어있기에 해설사가 틀리게 말하면 금방 관람객이 여기 해설문과 다르다고 손을 번쩍 들기 때문에 해설사들도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

    

이 거대한 절이 스스로 문을 닫아야할 이유는 무엇인지 그 많던 신도들은 순순히 절의 패망을 지켜만 보고 있었는지 참으로 답답하다. 역사는 흐르고 나라의 흥망성쇠도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영웅호걸들도 세월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 저세상으로 갔다. 이런 역사의 현장에 서면 덧없는 세월의 수레바퀴 구르는 소리를 듣고 가신 분들의 삶을 생각해 본다